일반

술을 끊었다

youwinlife 2025. 4. 6. 06:39
반응형

그냥, 안 마시게 됐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친구들과의 모임, 회사 회식, 가족 행사, 분위기 좋은 저녁 식사 자리엔 언제나 자연스럽게 술이 있었다. 여행가면 항상 지역에서 맛있는 술을 찾았고 막걸리부터 증류주, 중국술, 위스키까지 골고루 마셨다. 일상에서 술이 빠지면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항상 있었고, 특히 인간관계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술은 어른의 특권이자 즐거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굳이 마시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그냥 물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었다. 술잔을 거절하는 게 처음엔 나조차 어색했지만, 놀랍게도 그날 이후로 다시 마시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거창한 결심도 없었다. 누구에게 자랑할 만큼의 계기도 없었다. 담배를 끊었던 것처럼 그냥, 안 마시게 됐다. 그리고 그 ‘안 마시는 삶’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를 바꾸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달라진 건 회식 다음 날 아침이었다. 예전엔 회식이 있는 날이면, 다음 날은 늘 고통의 아침이었다. 눈을 떴지만 머리는 무겁고 속은 더부룩했다. “어제 내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싶은 불안감에 단체 채팅방을 뒤적이며 실수를 했는지 확인하던 기억도 많았다. 괜히 가벼운 농담조차 찝찝하게 느껴지고, ‘괜한 말을 했나’ 자책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술을 마시지 않으니, 아침이 달라졌다. 회식이 있었던 날의 다음 날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또렷하게 떠졌다. 전날 대화 내용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어색한 장면도 없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 마음도 편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반가웠고, 출근 준비도 한결 가벼웠다. 처음에는 단순히 숙취가 없어서겠거니 했지만, 그건 단순한 차이를 넘는 변화였다.

그다음으로 찾아온 변화는 기억력이었다. 예전에는 누군가와 나눈 대화가 어딘가 흐릿하게 남았고, 책을 읽어도 몇 장 지나면 앞부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사람의 말, 표정, 분위기까지도 또렷하게 남는다. 기억이 또렷해지자 관계도 달라졌다. 상대방의 말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다음 만남에서 그 대화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기억한다’는 건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잇는 일이란 걸 새삼 느꼈다.

술은 뉴런 간 신호 전달을 교란한다. 술을 마시면 뇌 속의 GABA(감마-아미노부티르산)가 과활성화되어 뉴런의 활동을 억제하고, 반대로 글루탐산은 억제되어 흥분을 줄인다. 그 결과 뇌는 둔해지고, 판단력과 기억력은 함께 흐려진다. 일시적으로는 ‘기분 좋게 취한 상태’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상은 뉴런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다. 술먹고 난 다음날 배가 아픈 이유도 생각해보니, 이미 많은 음식을 먹어 배가 부른데 뉴런이 기능을 안하니 2차 3차를 가도 배가 안부른 것처럼 느껴서 계속 먹어댔던 건 아닌가 싶다. 술을 깨면 그 책임을 져야했던 것이다.

해마(hippocampus), 즉 기억을 담당하는 뇌 부위는 음주에 민감하다. 장기적인 음주는 해마의 구조 자체를 손상시키고,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거나 감정과 연결짓는 기능을 약화시킨다. 요즘은 자주 망각한다. 특히 사람 이름이 잘 기억이 안난다. 처음엔 노화로 인한 것으로 여겼는데, 술을 끊고나니 술로 인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나는 기억을 더는 놓치고 싶지 않다. 내가 겪는 하루하루를 또렷이 느끼고, 내 안에 고스란히 저장하고 싶다.

난 요즘 건강하게 늙어가는데 관심이 많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고 있으며 내 몸의 변화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알콜은 체내에서 활성산소(ROS)를 증가시켜 세포에 스트레스를 주고, 염증 반응을 일으키는 호르몬을 활성화시킨다. 그로 인해 피부 노화는 물론이고, 간과 뇌, 면역 체계 전반에 걸친 노화가 가속화된다. 겉으로 보이는 피로한 얼굴뿐 아니라, 내 몸 안에서 조용히 진행되는 쇠약의 신호들. 그건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더 늙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 속도를 스스로 늦추고 싶었다. 술을 마시면서 빨리 안늙고 싶다는 이야기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나서부터, 나는 새로운 고민과 마주하게 됐다.
"술 없이도 인간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을까?"
회식 자리, 친구 모임,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
‘술 한 잔 해야지’라는 말로 시작되는 그 수많은 순간들 속에서, 나는 이제  '괜찮아, 나 오늘은 안 마셔'라고 말해야 했다. 처음엔 어색했다. 혹시 분위기를 깰까, 불편하게 보일까 걱정되기도 했다.

아니 주변에서 나를 더 이상하게 본다. 계속 "왜?"라고 수시로 물어본다. 수십년을 함께 했던 일을 그만두니 궁금해한다. 뭔가 아픈데가 있는건지, 사고를 쳐서 그런건지... "그냥" 이외에는 별로 답할게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술이 주는 장점은 확실히 사라졌다. 소주 석잔을 연거푸 마시면 오는 그 나른함, 경계를 무너뜨리는 힘. 그것이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더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 더 웃고, 더 잘 들어주고, 더 진심으로 공감했다. 술잔 대신 마음을 채워보려고 노력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술을 먼저 꺼내기보다는, 다양한 이야기거리로 분위기를 풀어가려고 노력한다.  최근 본 영화, 작은 일상의 에피소드, 때로는 조금은 진지한 고민까지. 처음엔 낯설고 삐걱거리던 대화들도,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술 없이도 마음을 나누는 자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점점 더 많은 순간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너 술 안 마셔도 분위기 나쁘지않다”는 말은 노력의 댓가를 받는 것처럼 뿌듯하다.

‘내가 달라졌지만, 관계는 그대로구나.
술을 끊었다고 달라질 관계였다면 애초에 그 관계는 의미없는거구나.’를 느낀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어떤 잡음을 넣지 않고 온전히 살아가고 싶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어떤 말들로 하루를 채웠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를 또렷이 간직하고 싶다. 술을 줄이면서 얻은 건 단지 맑은 아침이나 건강뿐만이 아니다. 나라는 사람의 조각들을 다시 연결해주는, 깊숙한 곳의 작은 회복이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 진심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생각보다 큰 변화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나의 결심을 존중하고 변화를 지켜주고 싶다.

반응형